12월의 독백 /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12월 어느 오후 / 손석철
덜렁 달력 한 장 달랑 까치 밥 하나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썰렁 저녁 찬바람 뭉클 저미는 그리움.
12월은 / 하영순
사랑의 종 시린 가슴 녹여 줄 따뜻한 정이었음 좋겠다.
그늘진 곳에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었음 좋겠다
딸랑딸랑 소리에 가슴을 열고 시린 손 꼭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었음 좋겠다
바람 불어 낙엽은 뒹구는데 당신의 사랑을 기다리는 허전한 가슴.
12월 중턱에서 /오정방
몸보다 마음이 더 급한 12월, 마지막 달 달려온 지난 길을 조용히 뒤돌아보며 한 해를 정리해보는 결산의 달 무엇을 얻었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를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이해할 자를 이해했고 오해를 풀지 못한 것은 없는지 힘써 벌어들인 것은 얼마이고 그 가운데서 얼마나 적선을 했는지 지은 죄는 모두 기억났고 기억난 죄는 다 회개하였는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한 일에 만족하고 있는지 무의식중 상처를 준 이웃은 없고 헐벗은 자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있고 꼭 기억해야할 일을 잊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 저런 일들을 머리 속에 그리는데 12월의 꽃 포인세티아 낯을 붉히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12월 / 임영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12월의 공허 / 오경택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 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 보따리 움켜쥡니다
내 안에 웅크린 욕망의 응어리는 계란 노른자위처럼 선명하고 뭉개도 뭉그러지지 않을 묵은 상념의 찌꺼기 아롱지는 12월의 공허
작년 같은 올 한 해가 죽음보다 진한 공허로 벗겨진 이마 위를 지나갑니다.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2월의 기도 /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12월 /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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