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자연

[스크랩] 이생진 님의 가파도 시편

비원(榧園) 2009. 10. 22. 14:25

 * 가파도로 가는 배에서 본 산방산과 한라산

 

♧ 아름다운 파도 - 이생진

   -- 가파도 1

    

노도라는 것이 있다

까닭 없이 바위에 시비를 걸며

제 다리로 제 몸을 감고 넘어지는 분노

왜 그럴까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고래 등을 큰 바위로 눌러 버리듯

산만한 파도가 화를 부리는 분노

첫 바람 앞에서 촛불을 살리기만큼이나

그 노도를 가라앉히기 어렵다

제물을 바쳐 노기를 달래려 해도

제상(祭床)을 때려 부수는

분노를 가라앉힐 길이 없다

어느 산자락이 저만한 노도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물에 바람이 일고

산에 불이 이는 광기

 

 * 가파도로 가는 배에서 본 모슬포와 모슬봉

 

하지만 물에 불이 덤비면 불이 멸하고

산에 바람이 불면 바람이 멸하는데

가파도엔 산이 없어 산불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에 바람이 일면 산불처럼 이는 파도

산이 타버리면 재가 남는데

바다는 타버려도 재가 남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엔 바다를 태운 재가 없다

그래도 이런 노도 속으로 다시 돌아와 사는 사람들

김씨 이씨 강씨 혹은 홍씨

산도 계곡도 없는 고향에 인동초처럼

하루 종일 바람 자기만 기다리다 잠이 드는 사람들

하늘 가마득히 날며 짝을 찾는 새

무덤가에 모여서 피는 엉겅퀴

아무 데나 뿌리박은 민들레

민들레의 고향은 어디일까

고향은 고국보다 진한 곳

외로우면 누구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

민들레도 구름을 닮아 흰 머리 날리며

고향 찾아 가는구나

 

 * 가파도 남쪽에서 본 마라도


 

♧ 어머니의 파도 소리 - 이생진

   --가파도 4

    

여든 두 살의 어머니

오늘도 잠수복에 태왁을 메고

바다로 나간다

열한 살에 시작한 물질이

살림이 되고

남편이 되고

수평선처럼 외줄 생애가 되었다

물소리가 아이들 소리 같기도 하고

남편의 소리 같기도 하다가

갑자기 뒤집히는 소리에 겁이 나

물 밖으로 기어 나온 슬픔을

물속에 숨기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구름처럼 뜨는 허리에 납덩어리를 차고

자꾸 뜨는 한을 물속에 가라앉히기 힘들어

내쉬는 휘파람 소리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남은 바닷길을 걸어간다

 

 * 가파도 상동쪽에서 본 산방산과 그 주변


 

♧ 수평선 넘어오는 어부 - 이생진

   --가파도 5

 

시인은 자기 도취로 바다에 빠진다하지만

꽃은 무엇에 미쳐 바닷가로 오는가

 

땀을 흘리며 그물을 지고 이리로 오는 어부

폐선만큼이나 벗어진 이마엔 유월의 뙤약볕이

불화로처럼 달아오르고

세월은 눈을 찌푸리며 이마 위를 뒹군다

찬바위에 그물을 내려놓고 대나무 지팡이로 몸을 가누며

넘어온 수평선을 바라본다

바위만큼이나 무거운 추억이

바다 속 깊이 가라앉는 것을 보듯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푸념

남들은 자식 덕도 많이 본다는데,

아니 자식 덕도 보기는 보는 셈이지만

왜 요 모양 요 꼴이냐고 탄식한다

 

   * 가파도에서 오다 본 산방산과 한라산

 

강원도 오징어잡이도 한두 번은 잘 됐다고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냐

말짱 헛것이다 헛것

그건 나하고 통하는 소리

육십이 넘도록 살아온 게 헛것이라고 푸념하는 어부

그물에서 손바닥만한 검은 돔 세 마리 풀러내며

회 쳐 줄 테니 먹고 가라고

다 썩어가도 인정만은 살아 파닥이는 어부

할망구는 몇 년 전에 심장병으로 죽고

어부 나이 예순여섯

이때부터 한에 맺힌 소리를 풀어놓는다

 

 * 가파도 북쪽 해안에서 본 바다

 

"자슥들 있으면 무엇합니까

남의 아버지는 그 나이에도 배질을 한다고 투정인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할망구가 살았으면 내가 이걸 하고 있겠소?"

검돔 여섯 마리째 꺼내놓는다

"할망구 병으로 어선 팔아 다 디밀고

남은 것이 뭐 있나요 누이동생이 마련해 준 이 빈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먹고 살지요"


'살지요' 산다는 것

 

"자슥들 중엔 잘하는 놈도 있지만

못난 것은 사고나 치고 돈 가지고 오라 가라

이 늙은 게 무슨 팔자로‥‥

할망구도 그렇지 집을 판다 배를 판다

일본까지 건너가 하다하다 안되어

굿을 열세 번이나 했는데도 낫지 않아

결국 있는 것 다 없애고 세상 떠났지만

이젠 희망도 없고 죽기만 기다리는 거지"

 

 * 가파도 하동항 앞의 등대

 

'희망도 없고 죽기만 기다린다'

그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거

 

파도 소리는 사람의 소리를 개똥만치도 여기질 않는데


나는 그렇게 파도를 사랑했것만

파도는 나를 개똥만치도 여기지 않는다 그거지?

 

그를 지켜본 사람 중에는

그를 나무라며 그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젊어서 잘해야지

그 사람 얼굴을 보쇼 주독이 들어 벌 쐰 것 같은 얼굴

술은 왜 그렇게 먹어대는지 성한 날이 없지

그러고는 제 각시 때려주더니

그래도 계집을 찾아, 무슨 낯으로

그 여자 고생 많이 했지 물질해서

어떻게든 살려고 애를 썼는데

무슨 팔자로 두들겨 맞기만 하다

골병들어 간 거야

그래도 계집 생각하던 겨"

그 소리 못들은 척하고 돌아서면

수평선이 너무 진하다

어쩌면 삶이 그렇게 갈기갈기 찢기는 파도 같을까

 

 * 가파도 서안에서 본 마라도

 

"교문 옆에 서 있는 동상은 잘 타고 났데요"

"그분은 가까운 친척인데 경주 김씨 잘 타고났죠"

 

김성숙(金成淑)선생

1896년 가파도에서 태어나

1908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에 참여

투쟁 중 검거 투옥 옥고를 치르고

가파도로 돌아와 가파신유의숙 (加波辛酉義塾)을 설립

문맹퇴치운동에 선봉을 서다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으로

민주정치의 향도에 헌신했다

 

그는 왼손에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있고

유리 없는 안경의 눈빛은 아직도 영롱하다

가파도의 주민들이 그러하듯 그는 산방산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쪽에서 희망 같은 태양이 떠오른다

 

 * 가파도 항아리바위(?)에서 본 모슬봉 주변

 

그런데 어부는 '나는 뭐냐'고 하지 않는가

"검돔 이거나 회쳐 줄 테니 자시고 가시오"

"오후 배로 가야하니 배가 안 오면 다시 오죠"

 

마라도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방파제에 널어놓은 보리는 튈 정도로

불이 많이 올랐다

구름이 내려다보고 허무하다 한다

 

자기가 회를 쳐 줄 테니 먹고 가라 한다

가파도 마라도

 

아니 자기 혼자이니 자고 가라 한다

늙으면 외로운 거 외로운 사람끼리

피부는 소용없고 고독을 비비며 이야기하자 한다

 

 * 가파도 북쪽 바닷가의 정자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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